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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철학

[인도철학] 비정통학파 짜르바까(Carvaka) 대한 생각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특히나 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을 형이상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인식적으로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여러 사상들을 모아서 내 생각을 쌓았다가 무너뜨렸다가 반복하다 보면 완성되지 않아도 그 과정이 나에게 중요한 자산으로 남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오늘은 인도의 비정통학파 짜르바까(Carvaka)로 생각을 쌓고 무너뜨리던 과정을 공유해보려고 한다.  

 

 

인도철학의 구분

인도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인도의 모든 철학, 종교의 근원인 베다(Veda)의 권위를 따르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구분 기준이 된다. 베다의 권위를 따르는 학파는 정통학파로, 그렇지 않은 학파는 비정통학파로 분류된다.

베다 경전들 - 출처: Wikipedia(Preethi1830790, vedas, 2020. 02. 15.)

 

짜르바까(Carvaka)는 비정통 학파 중 하나이다. 짜르바까 학파는 철저한 감각적 쾌락주의를 추구한다. 짜르’carv’가 먹고 마시고 즐김을 의미한다고 하니 본능에 얼마나 충실하기를 주장하는지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짜르바까는 학파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최초의 유물론자 학자, 사람을 지시하기도 한다.

 

 

짜르바까와 유물론

짜르바까가 유물론적 요소를 띈다는 말은 원자론의 입장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여기서의 원자론은 서양에서 후기자연철학을 말한다. 고전적으로 물리학의 개념에서 원자는 물질이 쪼개어진 최소단위일 뿐 개체의 질은 사라진다. 인도철학에서는, 원자론을 기반으로 양의 차이가 질의 변화(질적인 차이)를 초래한다고 설명한다. 재미있게도 짜르바까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칼로 그의 목을 치는 것은 그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칼이 몸에 있는 공간 틈을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도덕을 부정하게 된다. 

 

 

칸트의 이율배반을 극복한 성언량

인도철학은 칸트가 인간 이성의 한계로 제시한 이율배반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도철학에서는 인식과 존재가 연결되는 지식의 타당한 근거로 세 요소 직접지(지각), 간접지(추론), 성언량(경전의 권위 혹은 믿을만한 사람의 말 등)을 제시한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대표적으로 신의 존재와 우주론에 대해 접근할 수 없으며 그 앎에 닿으려 할 때 모순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인도철학에서는 이것이 경전이나 믿을만한 사람의 말, 성언량에 근거하여 인식과 존재를 연결할 수 있다. 믿을만한 사람은 학자, 수행자 두 그룹을 말한다. 경전의 권위는 인도 사상이 갖고 있는 종교적 특징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인식은 칸트가 말하는 객관적 보편적 지식을 얻기 위한 구조가 아니라 일상에서 진리대로 살아내기 위함이기에 성언량과 같은 경험적 사실을 중시한다. 짜르바까는 지식의 타당한 근거로 직접지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른 학파들과 다르다.

 

지각(Perception)은 감각기관의 자극으로 생기는 의식을 말한다

 

직접지(지각)만이 지식의 근거인가

짜르바까는 지각만을 지식의 근거로 인정한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지각에 근거해서만 타당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추론은 귀납이라는 점에서 온전히 보편적일 수 없기에 오류 가능성이 있으므로 지식의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언량 역시 추론의 연장이기 때문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쉽게 논파된다. 인도의 비정통학파 중 하나인 자이나 학파는 짜르바까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짜르바까는 지각만이 타당한 지식의 근원이라고 하지만 그 명제 자체가 지각을 통한 지식이 아니라 추론된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명제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지각만이 타당하다"고 하지만 저 명제가 지각이 아니기 때문에 타당해지지 않는 모순이 발생한다.

 

 

자이나교의 반박

자이나교는 짜르바까의 지각만이 지식의 근거라는 말을 부정하고 추론을 다시 지식의 근거로 편입시키기 위한 논지를 편다. 추론이 언어적 증언이 때때로 잘못될 수 있다 할지라도 정말 믿을만한 사람의 말(예를 들어 과학자가 관찰을 통해 물이 H
2
O
라고 말한다)
이라면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형식에 따르는 추론은 타당할 수 있다. 추론과 성언량, 그리고 지각은 각각 독립적인 지식의 근원이 아니라 서로 지식을 향한 상호보완적 근거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내용은 추론의 도움을 받고, 추론으로 파악할 수 없으면 언어적 증언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지각에도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도 지적할 수 있다.

 

 

짜르바까와 버클리?

한편으로는 유물론적 관점을 나타내는 짜르바까의 인식론이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 1753)의 인식론을 통해 방어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짜르바까 학파에서 지각만이 지식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버클리식으로 지각되는 것은 확실하게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적어도 지각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냄새가 있었다는 것은 곧 냄새가 맡아졌다는 것이다. 소리가 있었다는 것은 말하자면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색깔이나 모양이 있었다면 시각 또는 촉각에 의하여 그것들이 지각되었다는 것이다. (...)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Esse est percipi)

 

물론 버클리는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을 지각하는 마음 즉 사유하는 사물 밖에서 그것들이 어떤 존재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각이 존재가 된다는 점은 인도철학에서 인식과 존재를 이어주는 지식의 근거가 되기에 적합해보인다. 또한 버클리 역시 객관적으로 의심될 수 없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고자 내 놓은 사상이었다. 오류 가능성이 있음으로 인해 추론이 지식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짜르바까 학파의 의견과 통한다. 버클리도 짜르바까 학파도 경험으로서 확실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버클리의 사상에 주된 비판으로 제시되는 것은 인식의 측면과 존재의 측면을 혼동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인도철학에 있어서는 인식론과 존재론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학문의 분야라고 이해된다. 앞서 말했듯 인도의 인식론은 일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식론을 파악했고 인식을 통해 존재가 결정되는 것이 모순적이지 않다. 어쩌면 버클리의 이론이 짜르바까 학파의 입장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도 있는 단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본능과 쾌락

짜르바까 학파는 자체적으로 모순되는 점을 가지고 있고, 세계가 혼란스러울 때 등장했다가 안정기가 되고 체계가 잡히면서 가장 먼저 비판받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흠도 많고 정합적이지도 못한 학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게 짜르바까 학파는 굉장히 매력적인 이론으로 다가왔다. 내세도 없이 현재의 쾌락에 집중하면서 산다는 점이 실제 우리의 삶과 괴리가 있지만 마음속에선 열망하는 부분이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본능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본능을 해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세상이 창조되던 때 옷도 입지 않고 부끄러움도 선악도 모르던 에덴동산에서 살았다. 짜르바까 학파는 마치 현실에서 에덴동산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행복한 모습

 

동물적인 모습과 행복

본능과 지각만으로 사는 삶은 인간도 쾌락만을 중요한 가치로 삼도록 한다. 흔히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이성의 사용, 추론능력의 사용을 말한다. 그러니 짜르바까가 말하는 본능과 지각으로만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어찌 보면 동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반시대적 고찰에서 동물의 삶을 찬양하는 것이 떠올랐다. 니체에 의하면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잊을 수 있다는 것”, 즉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역사적으로 사는 인간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이나 반복되는 되새김질로만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인간이 역사적으로 살 수 있는 한도를 넘으면 어떤 개체든 파멸하게 된다.

 

동물은 추론능력 없이 비역사적으로 산다. 과거의 것을 잊는 능력은 동물이 매 순간 본능에 충실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이유이다. 동물은 현재에 완전히 몰두하여 꾸밀 줄 모르고 감추지 않으며 매 순간 진정 있는 모습 그대로 산다. 어린아이는 동물과 같이 산다. 맹목적으로 행복하게 과거를 부인할 필요가 없는 어린아이의 노는 모습을 보며 인간은 잃어버린 낙원을 기억하는 것처럼 감동받는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과거를 잊으려 노력해야한다. 짜르바까의 삶은 이러한 반시대적인 인간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니체는 덧붙여 역사적 인간은 자신의 의미가 과정이 경과하며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고 믿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과정을 고찰하여 현재를 이해하고 더 강력하게 미래를 열망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를 초월한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앞으로 펼쳐질 역사에서 구원을 보지 않으며 그에게 삶은 매 순간이 완성이나 종말과 같다. 짜르바까 학파 역시 구원을 중시하지 않는다. 인도철학에서 구원이 말해질 때에는 영원히 고통이 없음을 말한다. 짜르바까는 육체가 있을 때에만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이 곧 해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탈은 우리가 삶에서 느껴야 하는 쾌락이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해탈이 삶의 목표가 되지 못한다.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행복

어떤 사상을 공부하다 보면 마치 그 사상이 진리인 것 같다가도 다시 돌이켜보면 어떤 철학도 형이상학적 진리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쾌락은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 좋아하는 음식들과 잘 어울리는 술과 음료를 차려놓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순간을 즐기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정말 기분좋은 일이다. 온전히 이러한 일들만 하면서 살아간다면 참 좋겠지만 나는 이런 일상을 며칠 이상 보낼 용기가 없다. 하지만 매일 일상 속에 행복한 순간들이 조금씩 있다. 그 순간을 즐기고 온전히 느끼고, 그 쾌락에 힘을 얻어서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준비해나간다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참고자료]

  • 김형준, "인도철학" 건국대학교, 2018. 10. 30.
  • 황설중, 버클리와 회의주의, 철학연구 44권 0호,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1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2005
  • 네이버 블로그 one finger, 인도철학- 짜르바까의 유물론, 2011 (https://blog.naver.com/vivascenario/60128968742)